세계사_중세시대의 역사 다큐멘터리 줄거리요약 개꿀리뷰

2021. 9. 14. 19:58개꿀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Fq8uxWX5VRU 

 

전쟁과 지식의 시대(빛을 향하여)

 

1. 바이킹과 키예프

2. 이슬람과 알콰리즈미(알고리즘)

3. 몽골제국과 칭기즈칸

4.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

5. 아프리카 말리의 만사무사

6. 콘스탄티노플과 오스만제국

7. 르네상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교도들의 손에 유럽이 약탈당하고

유목민이 아시아를 정복하고

이슬람교가 기독교 나라와 충돌한 시대

동서가 만났고 남북이 만났습니다

교역과 지식의 연결망이

수 세기 동안 불신과 무지

전쟁에 의해 분열되어 있던 문화들을

연결하기 시작했습니다

배움의 빛이 세상을 밝히면서

어둠의 장막이 걷혀갔습니다

역사가 항상 그렇듯

이 시기는 전쟁의 시대이며

지혜의 시대였습니다

 

1. 바이킹과 키예프

서기 880년 유럽의 이야기입니다

유럽은 암흑의 시대로 알려진

중세시대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문명은 휘청거렸고 발전은 멈춰 섰습니다

야만성과 부족전쟁이 가득한 시대였습니다

로마제국이 5세기에 몰락한 이후로는

문학과 예술, 교육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기독교는 느리게나마 계속 전파되었지만

강력한 이교도 부족들 때문에

그마저 쉽지 않았습니다

그중에서도 북쪽의 야만인들이

가장 두려운 침입자였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이킹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하며

어디를 가든 땅을 빼앗았습니다

북쪽 사람들은 몸체가 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아이슬란드와 영국제도

프랑스를 폭력으로 장악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 정복 활동을 통해

깜깜하던 유럽에 빛이 비쳤고

신세계 질서의 토대가 마련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882년 봄이었습니다

 

루스라는 부족의 바이킹 군주였던

올레크가 부하들과 함께

북유럽의 드네프르강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올레크는 변절한 두 바이킹 전사

아스콜드디르를 뒤좇는 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왕의 허락 없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역장소를 장악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이 바로 키예프입니다

키예프는 드네프르 강가에 있었는데

이 지역 상인들은 강을 통해

부유한 문명사회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올레크의 목표는 키예프 점령이었습니다

그러면 루스족이 스칸디나비아와 흑해로 가는

물자를 통제할 수 있었습니다

 

올레크는 부하들이 상륙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상인으로 위장했습니다

올레크가 아스콜드와 디르에게 인사하는 동안

그의 부하들은 키예프를 포위했습니다

그러자 올레크는 본색을 드러내고

키예프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습니다

이어진 전투에서

아스콜드와 디르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올레크는 자신을

키예프의 새 군주로 선포했습니다

키예프는 지금도

올레크의 승리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루스족은 남북을 오고가는

모든 교역로를 통제했습니다

이 땅에 정착한 바이킹은

무역을 하며 번영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역의 요충지로 수익이 불어나면서

키예프는 수도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올레크와 루스족에게 이 도시는

더 큰 목표에 다가가는 통로였습니다

드네프르강 하구에 이르면 흑해와

전설적인 도시국가가 나옵니다

바이킹이 미클라가르드라고 부르는 (Miklagardr, 큰 성벽)

이 도시는 콘스탄티노플입니다

 

서기 330, 비잔티움이 있던 자리에

로마인들이 세운 콘스탄티노플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아시아에서 오는 모든 무역이

여기서 통제되었습니다

바이킹은 콘스탄티노플을 계속 노렸지만

이 도시의 성벽은 뚫린 적이 없었습니다

올레크는 다른 전략을 취했습니다

폭력보다는 외교를 택한 것입니다

키예프와 콘스탄티노플

또 흑해 너머의 수익성 좋은

시장들을 연결하는 무역협정을 맺었습니다

올레크와 루스족 덕분에

키예프는 더욱 부유해졌습니다

러시아라는 국가명칭은

이 바이킹 부족의 이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키예프는 새로운 무역과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올레크가 죽고 65년 후

키예프의 이교도 통치자인 블라디미르 1세는

세계 최대 종교 중 하나를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블라디미르는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빼앗겼다는 이유로 유대교를 거부하고

이슬람교는 술을 금지해서 거부했다고 합니다

바이킹에게 술은 생명과도 같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동방정교회가

키예프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키예프 전역에 양파 모양 지붕의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성화가 등장했습니다

기독교는 러시아를

강력한 우방국과 연결해 주기는 했지만

가장 강력한 세력은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당시는 이슬람제국의 황금기였기 때문입니다

 

2. 이슬람과 알콰리즈미(알고리즘)

 

9세기 이슬람제국은

3천만명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파키스탄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스페인에 이르러

로마제국보다 거대한 규모였습니다

이슬람문명은 수학과 과학

새로운 지식의 변경을 개척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새로운 빛을 비추기 위해

최고의 인재들이 모든 힘을 쏟아부었습니다

서기 827, 한 무리의 이슬람 수학자와

천문학자들이 이라크 북서부지방

신자르(Sinjar) 사막에서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이슬람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기념할 수 있도록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연구진을 이끌던 무함마드 이븐 무사 알콰리즈미는

바그다드에 자리하고 있는 이슬람 학문의 중추

지혜의 집의 학자였습니다

그는 당시에 가장 큰 과학적 난제 중 하나를 공략했는데

바로 지구의 둘레를 알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유럽의 과학과 학문이 쇠퇴해가던 이 시기에

알콰리즈미는 고대자료를 통해 습득한 지식을 활용하고

고대 그리스의 실험도구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스트롤라베(astrolabe)라는 천체관측기구입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지구와 태양의 각도가

1도를 이룰 때의 거리를 측정합니다

 

측정결과, 109km를 걸어갔을 때

각도가 변한 것으로 계산되었습니다

그다음에는 109360도를 곱했고

지구 둘레의 길이가 약 39,000km임을 알아냈습니다

현대 계산값(40,075km)과 비교해도

매우 정확한 수치입니다

이제 알콰리즈미는 보다 정확한

세계지도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의 지도에는 2,000개가 넘는 도시가 표기되었고

이슬람제국 전역의 지형들이

정확히 표현되었습니다

 

알콰리즈미의 수학적 재능은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알고리즘(algorithm)을 발명했고

그 수학 공식들을 토대로 해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휴대전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우수한 과학과 교육을 추구한 이슬람의 열정은

웅장한 도시의 모습에도 나타났습니다

도시는 학습과 진보의 횃불이었습니다

이슬람제국의 서쪽 끝자락에

가장 찬란히 빛났던 스페인의 도시

코르도바(Cordoba)가 있습니다

유럽의 전초기지였던 이곳은

대중목욕탕과 상수도

포장도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중심에 이슬람교 대사원이 서 있습니다

 

대사원 안에는 대리석과 줄마노

벽옥으로 된 850개의 기둥이 있는데

로마와 이슬람 건축의 융합을 보여줍니다

최대규모의 기독교 도서관 장서가

수백 권에 불과하던 시기에

코르도바의 왕립도서관은

40만 권의 책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바이킹이 무역 경로를 개척해 전 세계의 상품이

유럽으로 자유롭게 흘러 들어가는 동안

이슬람제국은 동방의 사상이

서방으로 유입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등장하면서

융성했던 이슬람문화는 파괴되고

세상은 야만세계로 전락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3. 몽골제국과 칭기즈 칸

 

12세기, 몽골의 대초원에서

유목민 전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세상은 일찍이 그런 정복자를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테무친’(鐵木眞)이라 불렀지만

우리에게는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합니다

테무친이 9살 때

경쟁 부족이 그의 아버지를 살해했습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황야로 쫓겨났고

테무친은 생존을 위해

무자비해지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절대 잊지 않았습니다

형제가 분열하면

각각의 화살대처럼 부러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형제가 세상에 맞서 단결하면

한 다발의 화살대처럼

부러뜨릴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뭉치면 강해집니다

이 통찰은 훗날 그가 성취한

모든 업적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몽골 소년은 자라서 강력한 전사가 되었으며

거기에 현명함도 갖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경쟁 부족들을 하나하나 무찔렀고

방해가 되는 존재는 무자비하게 제거했습니다

다른 부족들에게는 제안을 했습니다

 

충성과 협력에 대한 대가로

형제애와 종교적 관용

전리품을 함께 나눈다고 약속한 것입니다

테무친은 유목민 부족들을 모아

하나의 막강한 병력으로 통합시켰습니다

그리고 1206년에 세계의 지배자

칭기즈 칸이라는 호칭을 얻기에 이르게 됩니다 成吉思汗, Chingiz Khan

그는 몽골 밖으로 제국을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목 생활에 익숙한 그의 부하들은

자급자족을 하며 가볍게 이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6년 만에 중국을 휩쓸고

베이징으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정복된 도시의 토양은

시신에서 나오는 지방으로 기름기가 많아져

무려 30일 동안 불탔다고 합니다

1223, 칭기즈칸의 중앙아시아

정복이 완성되었습니다

그의 군대에 학살당한 사람은

4천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불과 20여 년 만에 몽골제국은

동쪽으로는 베이징에서부터

서쪽으로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의 수도

(Vienna)의 경계까지 확장되었습니다

칭기즈칸은 영토 전체가 육지로 연결된

사상 최대의 제국을 이루어냈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국의 백성들에게

평화와 번성이라는 놀라운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시대입니다

이는 실크로드의 재개로 이어졌습니다

물품과 사상을 동에서 서로 흘려보내던

고대의 무역로입니다

이때까지도 유럽인들 대부분은

동아시아와 중국을 수수께끼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베네치아 사람들은

경이로운 동양문화에 빨리 눈을 뜨게 됩니다

대담한 이 모험가는 칭기즈칸에 필적하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는데

그 과정에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4.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

 

13세기 베네치아인들의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은

칭기즈칸 못지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유혈정복이 아닌

조세를 이용해 욕망을 충족시켰습니다

베네치아 지도부는

유행하는 중국상품에 관세를 부과하면

큰돈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더 많은 상품을 들여올 사람을 두면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일에 적임자가 있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의 아들

마르코 폴로(Marco Polo)입니다

 

1271, 그는 이 기회를 잡아

아버지 그리고 숙부와 함께

일생일대의 모험을 떠났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유럽 최고의 권력자인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가진 Papa Gregorio X

선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극동의 강력하고 부유한 제국과

무역협정을 맺고자 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 칸

전설적인 궁을 향해 떠났습니다

아주 길고 위험한 여정이었습니다

실크로드를 따라

중동과 페르시아 너머 고비사막을 지나

8,000km 이상을 가야 하는 대장정이었습니다

 

마침내 출발한 지 거의 4년이 지난 12755

일행은 상두(上都, Xanadu)에 도착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의 궁전이 있는 곳으로

지상낙원을 뜻하는

도원경(桃源京)으로 널리 알려진 곳입니다

쿠빌라이 칸의 통치하에 중국은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역동적인 문화사회로 진화했습니다

도로와 운하가 잘 정비되어 있었고

효율적인 우편제도까지 갖춘 제국이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이탈리아에서 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이들을 위해 큰 연회를 베풀고

마르코 폴로에게 유럽에 대한 질문을 쏟아놓았습니다

이국땅의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긴 황제는

외교관과 고문들로 이루어진 측근들 속에

마르코 폴로를 포함시켰습니다

덕분에 마르코 폴로는 중국을 자유롭게 여행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유럽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놀라운 일들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종이로 만든 돈, 연료로 쓰는 불타는 검은 돌멩이

뱀과 개를 고기로 먹는 풍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칸 황제를 17년 동안 섬긴 뒤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베네치아는 경쟁도시인

제노바와 전쟁중이었습니다

마르코 폴로는 포로로 잡혔는데

피사 출신의 작가인 루스티켈로(Rustichello da Pisa)

같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루스티켈로는 그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글로 옮겼고

곧 세상에 동방견문록이라는 책이 발표되었습니다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유럽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습니다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매혹적이었습니다

극동지역에 부와 지식과 발명품으로 가득한

경이로운 땅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유럽인들 눈에 세상이 순식간에 달라 보였습니다

세상은 훨씬 크고 풍요로운

흥미진진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서도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이국땅이 멀리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를 통해 풍요롭고 기회가 가득한

거대한 대륙이 세상에 소개됩니다

 

5. 아프리카 말리의 만사무사

 

이집트의 카이로, 13247

신기루가 일어나듯 사하라사막에

거대한 여행자 행렬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말리 사람들로

지도자는 만사무사(Mansa Musa)였습니다 만사; 황제, 무사; 모세라는 뜻

이들은 땅을 정복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만사무사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무기가 없었지만

그보다 훨씬 매력적인 것으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금()입니다

 

만사무사는 6만명의 신하와

각각 136kg의 금을 실은 낙타 70마리

황금홀을 든 500명의 노예를 이끌고 왔습니다

이들은 1년 동안 3,000km 이상을 이동했습니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만사무사는

이슬람교 성지인 메카로 순례를 가고 있었습니다

서아프리카에 있는 말리왕국은

영토가 거의 130에 이르렀습니다

서유럽보다도 큰 면적이었지만

아프리카대륙 밖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말리는 니제르강 덕분에 부유해졌습니다

강은 거대한 제국의 생명줄이었습니다

니제르강을 통해 북쪽과 남쪽의 상품이 운송되었습니다

 

그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왕이었으며

만사무사 제국을 둘러싼 소문은 빠르게 퍼졌습니다

50년 후, 스페인의 지도제작자들이

카탈로니아 지도로 알려진

일련의 지도집을 만들었습니다

아프리카대륙 중심에 앉아있는 사람이 만사무사입니다

만사무사덕분에 세상은

사하라사막 남쪽으로 펼쳐져 있는

거대한 대륙의 부와 잠재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14세기말의 유럽을 보면

금의 2/3를 말리에서 가져오고 있었습니다

만사무사가 말리에 남긴 유산은

금이 아닌 이슬람교 정신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사무사는 거대한 제국 전역에

수십 개의 모스크를 건설했습니다

 

그 웅장한 건축물들 중 젠네의 대모스크는

세계 역사상 가장 거대한 진흙 벽돌 건축물입니다

The Great Mosque of Djenné

그는 왈라타(Walata)와 팀북투(Timbuktu)를 비롯한

위대한 이슬람 도시의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도 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이후 수 세기 동안

문화와 상업 그리고

종교의 살아있는 중심지가 됩니다

아프리카는 만사무사를 통해

이슬람교 세력을 강하게 확장시키지만

이슬람교 자체는

새로운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기독교를 믿는

유럽이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6. 콘스탄티노플과 오스만제국

 

말리에서 북쪽으로 4,000km 떨어진 곳

세계무역의 교차로에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패권 다툼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1453, 콘스탄티노플

이슬람교와 기독교는

수 세기 동안 치열한 경쟁을 해왔고

예루살렘을 두고 십자군 전쟁도 치렀습니다

거대한 이슬람제국에 둘러싸인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저항세력의 섬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기독교를 믿는 유럽과 이슬람의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상업과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그 중심에는 모든 기독교 국가 중에서

가장 웅대한 교회인 성 소피아 성당이 있었습니다

Ayasofya; Sancta Sophia

 

14535, 도시는 포위당했습니다

8주 동안 10만 명의 병사들이

도시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제국의 지도자, 메메드 2세는 메메드; 메흐메트, 마호메트; 무함마드

어릴 때부터 이 도시를 점령하고 싶어 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눈앞에 있기는 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마치 요새와도 같은 도시였습니다

두 면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시를 둘러싼 성벽은

당대 최고의 방어력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도시내의 기독교 병력은

고작 5,000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메메드 군대는 거대한 대포로 무장했는데

포탄 하나의 무게가 500kg을 넘었습니다

포탄에 성벽이 뚫려 나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습니다

실전에 단련된 이탈리아 용병인

조반니 주스티니아니 론고입니다

Ioannes Iustinianus Longus

공성전의 전략과 전술의 전문가였습니다

하지만 메메드에게는

조반니의 예측을 뛰어넘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메메드는 도시의 천연항구인

금각만(Golden Horn)을 이용해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항구를 방어하기 위해

바다의 길고 두꺼운 쇠사슬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방어선을 통과한 적군은 없었지만

메메드에게는 기발한 전략이 있었습니다

그 쇠사슬을 돌파하는 대신

먼저 병사들이 배를 물 밖으로 끌어내고(?)

기름을 칠한 통나무들 위로

썰매를 밀 듯 배를 운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쇠사슬을 우회해서

배를 항구로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항구가 뚫리자 기독교 병력의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불길한 징조들이 잇따랐습니다

먼저 개기월식이 나타났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박을 동반한 폭풍이 몰아쳤고

짙은 안개가 깔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에 붉은 빛이 나타나

성 소피아 성당을 핏빛으로 물들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하나님이 그들을 버린 계시로 생각했습니다

529일 밤이 되자

오스만 병사들은 총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조반니는 건장한 병사들을 모두 성벽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굳건하게 다섯 시간을 버텼습니다

 

하지만 재앙이 들이닥쳤습니다

조반니가 치명상을 입었고

공포가 번졌습니다

오스만제국의 병사들이

도시 안으로 파도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었습니다

몇 시간 만에 거대한 성 소피아 성당에는

이슬람교의 기도가 울려 퍼졌습니다

그 이후로 이 성당은 모스크가 되었습니다

승리를 거둔 메메드는 도시를 둘러보았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승리에 대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건물들이 폐허가 된 것을 봤을 때

술탄은 통탄을 했다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천년 역사의

기독교 사회를 휩쓸어 버렸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은

이제 이스탄불(Istanbul)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오스만제국의 승리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도시를 점령한 후 메메드 2세는

유럽과의 무역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유럽상인들은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고

상품과 사상은 자유롭게 오갔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학자들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로 이주했습니다

도시의 장벽 안에서 유럽은

세계각지에서 흘러들어온 상업과 문화

지식을 통해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7. 르네상스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

 

1495년 이탈리아

유럽은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합니다 Renaissance

고대학문을 재발견하면서 시작된 움직임이지만

르네상스는 유럽에 새바람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새로운 건축양식, 새로운 화풍

새로운 돈과 새로운 자신감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부유하고 세련된 도시국가

밀라노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당대의 예술가들은 부유한 후원자들로부터

작품을 의뢰받기 위해 이곳을 찾았습니다

그중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있었습니다 Leonardo di ser Piero da Vinci

 

그는 13년 동안 밀라노의 공작

루드비코 스포르차를 위해 일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공작에게

매주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가반교, 전투기계, 잠수복 등

그의 아이디어는 끊임없이 샘 솟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발명가이자

음악가, 기술자였으며 화가이기도 했습니다

스포르차 공작의 가문은

새로운 정치계급에 속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유럽의 세계적 무역로

확장을 이용해 권력을 쥐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분에 걸맞은 품위를 갈망했습니다

공작은 열정적인 젊은 예술가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 갈망을 충족시켜주기를 원했습니다

스포르차는 밀라노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에 Santa Maria delle Grazie

복원 비용을 대고 있었고

레오나르도에게 수도원 식당의

벽화제작을 의뢰했습니다

전통적인 주제로 많은 화가들이

여러 차례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예수가 열두제자와 함께한

최후의 만찬’(Ultima Cena)입니다

 

공작은 이 그림이 다른 최후의 만찬보다

크고 인상적이길 원했습니다

레오나르도는 이것을 과거로부터 벗어나

독창적인 작품을 창조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그때는 예술과 과학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레오나르도는 고대 그리스 학자들을 연구했습니다

그는 자세한 해부도를 그릴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사람의 표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수학과 기하학에 대한 이슬람의 지식을 통해

레오나르도는 원근법 또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perspective

서서히 그림과 그 속의 인물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3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최후의 만찬이 완성되었습니다

예술과 과학이 그림을 통해

이토록 조화롭게 결합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사실적인 감정을 보여주며

예수의 제자들을 인간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충격, 슬픔, 분노

원근 효과는 그림 중앙에 있는 예수에게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림 속의 모든 것이

예수로부터 퍼져나갑니다

레오나르도는 고대의 지혜와

이슬람의 지식을 통해

새로운 유럽의 특징을 보여주는

이미지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그림은 기독교 유럽이 암흑시대를

벗어나고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새롭게 얻은 부와 자신감을 가지고

유럽은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

세계로 뻗어 나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중세시대 세계새 역사 개꿀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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