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부여07 도피의 심리학(020) 피노키오와 요나

2019. 6. 8. 18:37개꿀리뷰

https://youtu.be/nEPNOiQEWvE

7. 도피의 심리학

 

(1)희망과 소명으로부터의 도피: 저항

 

요나는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침략을 받았던

기원전 8세기경에 활동했던 예언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의 길로 인도하라.”는 것이

요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그러나 요나는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정 반대편인 다시스로 향하다가

바다에 던져져서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고 다시 니느웨로 향한다는 이야기다.

요나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했다로 시작하고 있다.

인간이 신의 음성을 어떻게 들을 수 있을까?

환상이나 계시를 통해 인간은 신과 의사소통을 한다.

때론 샤먼과 같은 영매나 제사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신과 접촉한다.

때로는 불가사의한 자연현상을 통해 신의 임재를 경험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경험을 초월한 신비하고도 환상적인 종교적 체험(numinose)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신의 음성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다.

어떤 이들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산천초목과도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개인의 영성이 온 우주와 자연과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어떤 이들은 신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이런 현상에 대해 늘 회의적이다.

신의 음성은 환청이나 환상처럼 일종의 분열적인 현상으로서

정상적인 정신작용이 아니라 병리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적인 현상과 심리학적인 현상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우리는 꿈속에서 어떤 목소리만 들리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누군지 모르지만 목소리는 있다.

그것은 너무나 신기하고 일상의 경험을 초월해 있기 때문에

대체로 외부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간주된다.

융은 이런 현상을 집단무의식의 전언으로 간주한다.

우리 안에 있지만, 전혀 생소한,

리고 태곳적 조상의 음성처럼 들리는 신들의 목소리는 바로 원형들의 외침이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들이 전수한 집단적 심리이자 우주적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융에 의하면, 원형은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이마고(imago)이며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보편적인 상이다(CW 9i, 5-6).

원형상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전달되는 것은 정신의 중심에 있는 자기(self)의 음성이다.

요나는 분석심리학 관점에서 볼 때, 정신세계의 중심에 있는 자기의 음성을 듣고 있다.

자기원형은 꿈이나 환상, 혹은 신화와 민담 등의 설화에서

구원자나 신의 이미지로 표출된다(CW 6, 789-791).

따라서 정신 내부에 있는 자기의 음성은 자신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절대 타자(the Other)로부터 들려오는 거룩한 음성으로 들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강한 정동을 지닌 콤플렉스 역시

자아와 구별된 인격으로서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성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너의 자존심을 건드린 자는 잔인하게 보복해도 돼!”

이런 따위의 음성은 마치 신의 의로운 심판처럼 들린다.

그래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강한 정동과 함께 들려오는 콤플렉스의 소리와

정신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자기(self)의 음성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그것은 고대예언자들의 신탁행위를 통해 알 수 있다.

내면의 심층에서 들려오는 신의 음성을 들었던 예언자들은 진실한 예언자로 남았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된 신념이나 주변의 여론에 편승했던 예언자들은

가짜 예언자로 역사에 기록된 점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정한 신(혹은 진리)의 음성과 콤플렉스의 음성을 구별하는 것은 자아의 역할에 달려있다.

콤플렉스와 동일시된 자아는 마치 자아상실 상태와도 같다.

그때의 자아는 콤플렉스의 노예가 되어, 콤플렉스가 명령한 것 이외는 다른 대안이 없다.

그러나 자기(self)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자아(ego)의 역할을 존중한다.

그러기에 고대 예언자들은 신의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고,

때로는 항의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엄청난 고난을 겪어야만 했다(참조. CW 17, 301).

자기는 의식의 중심인 자아를 통해 정신의 통합성을 추구한다.

그것은 마치 자아의식이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진실한 모습으로 다가 온다

전통적 기독교의 견해와 같이 한다.

 

요나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은 다음과 같다:

너는 어서 저 큰 성읍니느웨로 가서, 그 성읍에 대고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내 앞에까지 이르렀다”(요나 12).

그러나 하나님을 피해 요나는 니느웨와 정반대인 다시스로 향하는 도중에 큰 폭풍을 만난다.

하나님의 명령은 요나에게 강한 소명(calling)으로 다가온다.

거부할 수 없는 내적인 강한 요구는 너무나 생소해서

마치 외부에 있는 절대적 신으로부터 온 명령처럼 들린다.

그것은 하늘과 땅과 나와의 합일에서 드러나며, 의식과 무의식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

진정한 나(self)로부터 온 소명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확인시켜주며,

그것은 신성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정신 전체의 울림이다.

소명이 하늘로부터 부여되었으며, 나 자신이 그 소명을 감당해야하는 적임자라고 느낄 때

우리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일 때문에 나는 태어났으며, 그로 인해 나는 존재한다는 당위성이

삶을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소명의식이야말로 절망과 좌절로부터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큰 힘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융은 소명이야말로 자신의 내면에서 강력하게 들려오는

자신만의 법(law)이라고 주장한다.

 

인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유일한 것은 자신의 소명(vocation)이다.

(구원자로 부름 받은 자)는 바로 그런 모든 강력하고도 독재적인

정신적 필요에 의해 부름을 받았으며,

그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들의 고난(affliction)을 대변한다.

만일 그가 그 음성을 듣는다면, 그는 바로 격리되어 소외된다.

그것은 그가 내부로부터 내려진 법에 순응할 해결책을 찾아왔던 방식이다.

그 자신만의 법!” 모든 사람들은 외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야할 소명의 법이며,

자신을 덮친 사자와도 같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비록 그것이 의심할 여지없이 여느 사자가 아닌 자신을 죽이는 사자에 불과할지라도 말이다.

오직 이런 의미에서만 그는 그의소명이나 그의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CW 17, 304).

 

신으로부터 강한 소명을 받았다고 느낄 때 대체로 두 가지 정서적 반응을 보인다.

그 하나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초월적인 신을 만날 때 경험하는 환희의 감정이다.

그 환희는 대체로 황홀경에 사로잡혀 신체가 순간적으로 마비되는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밀려온다.

그것은 인간이 신을 만나면 죽는다.”는 고대인들의 전통적인 믿음체계에 근거한다.

인간은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압도되면 죽을 것 같은 두려움과 공포를 느낀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을 때 주어지는 가혹한 심판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그것은 곧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그러기에 모세는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라는 신의 명령을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거부했으며(출애굽기 4),

예레미야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예언자의 직무를 거부한다(예레미야 1).

그것은 사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최소한의 몸부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신의 영역에 대한 호기심과 갈망이 있다.

그것은 마치 무의식의 심층세계에 대한 갈망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과 같다.

이 상반된 양가감정은 신의 명령에 대한 순종과 거부라는 극단적 대립을 보이며,

그것은 당분간 혼돈된 양상으로 지속된다.

 

요나가 신으로부터 온 소명을 거부한 배경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문화적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고대 사회일수록 공동체의 신념이나 종교적 이상은 개인의 특수성을 허용하는데 인색하다.

요나로 대변되는 고대 이스라엘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이 택한 유일한 백성인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과 어울려서는 안된다.

그래서 이들은 이방 사람들과의 결혼을 금했으며,

종교적 전통과 사회문화적 전통을 공유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일종의 자기애적발상이며,

그것은 우월감과 열등감의 대극적 성향으로 표출된다.

요나의 신념에 의하면, 악한 자들은 심판을 받아야 하며, 선한 자들은 구원을 받아야 한다.

요나에게 이스라엘을 돕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박해한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이 같은 사람에게 엄마의 좋은 젖가슴과 나쁜 젖가슴 사이의 화해는 결코 없다.

악을 용납할 바에야 차라리 내가 죽고 말겠다.”는 지극히 정의롭고 확고부동한 신념과,

오직 나만이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이라는 우월의식이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거부하게 한 것이다.

요나의 강한 신념은 타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철학이 되었으며,

그것은 오랜 세월을 통해 아집과 독선과 일방적인 고집으로 무장된다.

이것은 마치 만성화된 신경증적 구조가 전체 인격을 대변하는 것과도 같다.

그러나 정신의 전체성은 어떤 경우라도

부분 인격이 전체 인격을 지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의식의 주체인 자아는 무의식과 교감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

그러나 일방적 성향의 페르소나는 자아로 하여금 다른 내면 인격과 만나는 것을 방해한다.

유대인이라는 선민의식으로 가득 찬 요나의 페르소나가

자아로 하여금 그림자를 보지 못하게 하며, 자기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

일방적 사고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유용한 것들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

신경증은 의식적 태도의 일방성에 기인한다.

이러한 일방적 태도에 변화가 생길 때 치료는 시작된다.

 

(2)자궁으로의 회귀: 죽음

 

바다에 던져진 요나는 큰 물고기에 의해 삼켜지고, 그 안에서 3일 주야를 보내게 된다.

피노키오가 상어의 몸속에서 제페토 할아버지를 만나는 장면도 이와 유사하다.

상어 몸속에는 조그만 식탁과 먹을 것이 있다.

피노키오는 할아버지와 함께 상어 뱃속에서 탈출한다(Collodi, 2004: 247-249).

융 또한 바다괴물에 먹힌 영웅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한 영웅이 서쪽에 있는 수중 괴물에게 잡아먹혔다(잡아먹힘).

그를 삼킨 짐승은 동쪽으로 향하여 항해한다(항해).

그동안 괴물의 뱃속에서 영웅은 불을 피우고(불의 점화)

배가 고파서 매달려 있는 심장 한 조각을 잘라낸다(심장 절단).

얼마 안 되어 그는 물고기가 뭍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상륙):

곧 괴물의 안에서 빠져나오려고 배를 잘라내기 시작한다(절개):

그런 다음 그는 밖으로 빠져나왔다(미끄러져 나옴).

괴물 물고기의 뱃속이 너무 더워 그의 머리카락이 빠져버린다(열기, 머리카락)

-영웅은 동시에 예전에 잡아먹힌(모두-삼켜짐)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이제 모두 밖으로 빠져나온다(모두 빠져나옴)(KGW 8: 76-77; CW 5, 310).

 

신화 속에 등장하는 바다 속 괴물(Leviathan)과 같은 큰 물고기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의식의 세계이며(CW 7, 160),

그 물고기를 통해 우리는 세상을 치유할 약제(medicament)를 얻는다(CW 9ii, 180).

물고기 뱃속은 모성의 자궁과도 같다.

요나의 퇴행은 바다와 배의 가장 밑바닥을 거쳐

결국 더 이상 도망갈 수 없는 물고기 뱃속에까지 이른다.

이것은 모성의 태에서 탄생하여 다시 자궁으로 회귀하는 심리적 죽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요나는 신의 분노와 저주를 경험해야 하며, 죽음의 공포를 경험해야 한다(CW 16, 510).

신화나 민담에서의 죽음은 마지막이 아니다.

그것은 꿈이나 환상 속에서의 죽음처럼 부활이요 새로운 출발이다.

태양은 낮의 활동을 마치고 밤에는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다.

그것은 새로운 삶을 향한 어둠의 여정이다.

융은 이것을 밤바다의 항해(night sea journey)로 표현했다(CW 5, 312).

바다에서 태양은 재탄생을 위해 침강한다.

어머니 속에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은 또한

어머니를 극복하거나 죽이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불을 피운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만한 의식의 행위이고

그래서 모성 유착의 어두운 상태를 죽이는것이다(KGW 8: 79; CW 5, 311).

 

(3)자궁에서의 재탄생: 부활

 

태양과 마찬가지로 영웅은 새로운 탄생을 위해 모성의 자궁으로 퇴행한 다음에 부활해야 한다.

요나의 변모된 모습은 물고기 뱃속에서의 기도에 드러난다. 요나는 깊음 속에서 기도한다.

그의 기도는 깊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낸다. 물이 요나의 영혼을 위협했으며,

깊은 구덩이는 마치 바리공주가 여행했던 지옥의 세계와도 같다. 죽음 안에 생명이 있다.

요나의 생명력은 물고기 뱃속에서 바라본 성전으로 대변된다.

신의 거처로 알려진 성전 또한 모든 생명의 요람이자 모성의 자궁이다(CW 5, 313).

요나는 마치 회당에 들어가듯이 물고기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물고기의 두 눈은 마치 요나에게 빛을 주는 창문과도 같다.

그 물고기는 요나에게 바다 속과 깊은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준다(CW 5, 509).

자궁 속 공포는 재탄생을 위한 밑거름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공포는 편안하고 안전한 모성적 자궁에서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변형된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한 것은 융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자아와 자기의 신비한 합일이며 극적인 화해를 의미한다.

그것은 자아가 자기의 인도아래 있는 상태이며, 부분과 전체가 조화를 이룬 모습이다.

 

(4)소명수행 중의 절망과 좌절: 신념 유지 욕구

 

물고기 뱃속에서 육지에 토해진 요나에게 두 번째 신의 음성이 들린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선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되어 있다. 요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요나의 자아는 자기로부터 들려온 음성의 의미를 알고 있다.

그것은 조건 없이 살리라.”는 것이다. 생명에는 흑과 백이 없다.

이편과 저편이 없으며, 어떤 종교적 사회문화적 차별도 없다.

생명의 바다는 모든 것을 창조하고 모든 것을 거둔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과학적 지성을 최고의 가치로 둔다.

합리적 사고와 논리적 추론만이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로 인정된다.

자신의 세계관에 갇혀 지냈던 요나는 심리적 죽음을 경험한 후에

새로운 세상으로 향할 힘을 얻었다.

그것은 마치 신으로부터 온 소명을 수행하기 전에 거쳐야할 정결의식과도 같다(참조. 이사야 6).

요나와 니느웨의 대면은 피해자와 박해자와의 대면이자, 자아와 그림자와의 대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마지못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의 그림자이자 요나의 그림자인 니느웨는 제거되기보다는 변화되어야 한다.

인격의 일부인 그림자가 자아에 의해 인식될 때, 그것은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된다.

꿈이나 환상에서 불안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그림자는

어느 순간 전혀 다른 이미지로 변해있는 사실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 때 비로소 인격의 변화는 발생한다.

니느웨 백성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금식하면서 회개하는 모습은

현실적 감각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심리적 사건이 될 때 니느웨 백성들의 회개는 우리 내면의 사건이 된다.

니느웨 백성들의 돌아섬은 요나 내부에 있는 그림자의 변화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 모든 짐승까지도 동참한다.

야수적 속성을 지닌 본능까지도 의식과 무의식의 화해에 동참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켜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자아가 자기와의 관계가 정립될 때, 비로소 그림자가 인식되며 의식화의 길로 나아간다.

그것은 영웅이 모성의 자궁에서 죽음을 경험하고 다시 부활하는 것과 같다.

자기는 이처럼 자아의 철저한 희생을 요구하기도 한다.

요나가 자신의 그림자와 화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신념을 모두 포기해야만 한다.

 

재차 요구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요나는 마지못해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진정한 자아의 결단이 아니다. 선택받은 종으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은 결국 좌절과 허무함을 줄 뿐이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는 요나의 예상을 빗나간 것이었다.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악한 존재가 어느 날 갑자기 선한 존재가 되어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렇다면, 이전에 악한 사람이 회개하고

선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죄에 대한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

보편적 상식을 벗어난 하나님의 의도는 요나로 하여금 분노와 좌절을 겪게 한다.

의식의 판단과 지혜는 무의식의 불가해한 통찰력을 능가하지 못한다.”

심리학적 경험이 이를 뒷받침 해준다.

감성이 지성을 앞서며, 비합리성이 합리성을 능가한다.

그것은 생명이 지성과 합리성보다는 감성과 비합리성을 더 추구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엄마의 지성보다는 따뜻한 품을 원한다.

우리의 지성은 독한 냄새를 풍기지만, 따뜻한 감성은 북극의 얼음까지도 녹여버린다.

요나의 종교적 지성과 합리적 신념은 이제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그의 분노는 니느웨 백성들의 구원 때문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의 변화를 수용할 수 없는 좌절감에서 기인한다.

 

(5)분노와 저항: 존재감 확인

 

이렇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났다요나의 절규는

신으로부터 소외된 한 신앙인의 외침이자,

불합리한 현실 속에서 몸부림치며 존재감을 확인하려는 모든 사람들의 절규이기도 하다.

바르게 살고, 선하게 살고, 최선을 다하며,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요나의 정의는

사실 하나님의 정의가 아니었다.

자신의 신념과 이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길 때,

신앙인은 믿음에 대한 가치를 느끼며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그런데 이런 정신적 기둥이 무너질 때 자신의 존재감은 해체되며 살아갈 의욕을 상실한다.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요나의 탄식은

죽음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신에게 인식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자살은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에 대한 좌절에서 오는 일종의 자기방어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때의 신념은 대체로 무의식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는 의식의 일방성에 기인한 것이다(참조. CW 7, 354).

의식의 분노에 무의식은 오히려 냉담한 태도를 취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요나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 분노는 오히려 정당하지 못하다고 책망한다.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른다.

그것은 요나 자신만이 안다.

요나의 도피행각은 여기서도 재현된다.

요나는 하나님을 뒤로 둔 채 니느웨 성 동편에 초막을 짓고, 성의 동태를 살핀다.

여기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분노가 드러난다.

 

동시에 주관적 해석에 의하면, 요나로 대변되는 우리 모두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면에 있는 그림자와의 화해에 주저한다는 사실이다.

그때 하나님이 보낸 박넝쿨이 그늘을 만들어 요나를 시원하게 해준다. 그는 심히 기뻤다.

이 한순간의 행복감이 그동안의 고통과 좌절, 분노와 죄책감

그리고 못난 자신에 대한 수치심을 한 순간에 날려버린 것이다(요나 46).

그러나 그 행복감도 그리 오래 가진 않았다.

하나님은 벌레를 준비해서 다음날 새벽에 박넝쿨을 시들게 했다.

따가운 햇볕에 노출된 요나는 또다시 하나님께 사는 것 보다 죽는 게 났다.”고 하소연 한다.

요나는 책망하는 하나님께 이렇게 대항한다: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그건 정당합니다”(요나 49).

죽을지언정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요나의 단호함은

일방적 의식의 한계를 가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실감하게 한다.

하루 만에 사라질 박넝쿨도 그렇게도 귀한 존재인 것처럼,

니느웨 사람들도 아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박넝쿨과 벌레는 우리가 지닌 정서의 본능적 속성을 대변한다.

미미한 것에도 한없는 행복을 느끼며,

그런 행복감을 한 순간에 날려버리는 벌레 또한 우리의 모습이다(박종수, 2004: 273).

시원한 그늘을 한순간에 상실한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대변한다.

그것은 편안하고 행복한 자궁으로부터 퇴출된 아이의 모습이기도 하다.

 

(6)관망과 재구조화: 개성화를 향한 여정

 

시원한 그늘이 주는 순간적 행복감은 그동안 요나가 경험하지 못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벌레로 인한 절망감은 이전의 행복감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이처럼 부정적인 정서는 영혼을 사로잡고 오래 지속되지만,

긍정적이고 생명이 넘치는 정서는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순간의 행복은 전체 정신인 자기로부터 온 최고의 선물이다.

그 행복감이 생명의 원리와 만날 때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를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우리는 이 짧은 순간의 정서를 보존하고 음미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요나는 끝까지 하나님의 생명원리를 깨닫지 못한 채 무대 밖으로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의 개성화는 진행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끝까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은 요나에게 생명력이 살아있다.

하나님께 대한 저항은 무조건적인 반항이 아니라,

자신의 때를 기다려달라는 간절한 청원처럼 느껴진다.

아무리 귀한 생명원리라고 할지라도 때가 이르지 않으면

책장 속에 보관된 한편의 종이쪽지에 불과하다.

그것이 영혼의 일부가 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릴 필요가 있다.

요나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가운데 여전히 성장하고 있을 것이다.

 

다음시간에는 동기부여 마지막 영상 소명의식과 존재감 중에서

8. 희망의 심리학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