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부여04 불안의 심리학(017) 이집트왕자 모세의 소명과 존재감

2019. 6. 8. 18:34개꿀리뷰

https://youtu.be/HLlThDNgDvY

4. 불안의 심리학

 

소명에 대한 두려움은 그것이 개인의 의지를 초월한 것이기에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고대의 현자나 예언자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이 무엇인지 모를지라도

영감과 가슴으로 소명을 영혼의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Bolles, 47).

예언자들의 소명의식과 그 심리적 과정은 현대인에게도 많은 통찰력을 준다.

소명에 대한 원형적 이미지를 제공하는 고대 예언자들의 삶을 통해,

희망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위로를 얻을 것이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용기를 얻을 것이다.

 

모세는 종종 예언자의 원형적 표상으로 소개된다.

그것은 예언자들에게서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이 모세에게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모세는 히브리인으로 태어나서 이집트 왕궁에서 자란 인물이다.

비천한 계급인 사람이 지배계층의 고귀한 신분으로 자란 것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걸치고 있는 것과 같으며,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옷으로 대체될 것을 암시한다.

융심리학 관점에서 보면, 본래적 자아와 페르소나와의 갈등이 존재한다.

어쩌면 모세는 태어나자마자 자신에게 맞는 옷을 입기 위해 몸부림치는 뭔가 불편한 사람이다.

그는 현재의 모습으로 계속 살아갈 수 없다.

이집트의 왕자로 살아갈 것인지, 히브리인으로 돌아 올 것인지를 결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자아는 이에 대한 결단을 할 수 없다.

이집트의 왕자이면서 동시에 히브리인의 영웅으로 살아갈 수만 있다면 최상의 상태가 될 것이다.

자아와 페르소나와의 환상적 조화는 자아의 이상일 뿐, 전체 정신인 자기의 뜻은 아닌 것 같다.

자기는 자아가 페르소나뿐만 아니라,

그림자와 아니마 아니무스 등의 다른 인격들과의 조화를 동시에 추구하도록 독려한다.

모세의 내적 과제는 자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그것은 어느 정도 모세 자신이 바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기에 감히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결과 그의 방어적 무의식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한다.

그것은 작은 일로 큰일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모세는 히브리 사람을 박해한 이집트 병사를 죽이고 두려워서 광야로 피신한다.

그는 히브리 동족 전체를 구원하는 대신 한 사람을 구원함으로써,

한편으로는 동족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소명으로부터 도망갈 구실을 찾은 것이다.

작은 선행을 통해, 큰 선행을 베풀지 않아도 된 셈이다.

자신이 가난할 때는 재벌이 되어 구제사업을 하겠다고 결심하지만,

그 일이 부담스럽게 다가오자 고아원 몇 군데 찾아가 선행의 흉내만 내기도 한다.

모세 또한 자신에게 부여된 엄청난 소명을 회피하기 위해

작은 사건으로 위장하고 도피의 길을 택한다.

그래야 죄책감을 덜 수 있다.

엄청난 변화를 수반하는 소명대신에 작은 희망을 성취함으로써 보다 안전한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전체 정신인 자기는 자아의 도피를 마냥 두고만 보지 않는다.

도피는 또 다른 길이며, 변화를 촉진하는 매체가 된다.

모세의 도피는 오히려 더욱 더 소명의 길로 인도한다.

무의식의 땅, 황폐하고 삭막한 광야에서 만난 자신의 아니마(십보라)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아버지에게로 모세를 인도한다.

이집트 여인에게 선택되고, 친모의 보살핌을 받은 모세는

아버지 표상이 형성되지 않은 채 엄청난 소명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과도한 여성적 에너지는 남성성의 결핍을 초래한다.

긍정적인 아니마는 부성원형의 활성화를 돕는다.

아내인 십보라를 통해 아버지를 경험한 모세는 소명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한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미디안족의 제사장으로서 종교적 영성을 제공하는 인물이며,

집단의 표상이요 지배원리의 상징이다.

부성원형의 표상들이 이드로를 통해 모세의 경험 속으로 침투하고,

그것은 모세로 하여금 모성적 개인성을 초월하여 부성적 집단성으로의 이동을 촉진시킨다.

 

희망과 소망은 주로 모성적이며 개인적 차원에서 진행된다면,

소명은 부성적이며 집단적 성격이 강하다.

한 개인이 집단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개인적 영역을 초월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신적, 영적, 종교적, 심리적으로 깊은 차원의 세계로의 이동을 의미한다.

개인이 집단의 힘을 대변하거나 집단을 초월하는 능력을 지닐 때 소명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일은 개인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류의 원형적 집단성이 한 개인을 통해 분출될 때 가능하다.

 

그것은 대체로 영웅의 출현으로 구체화된다.

영웅은 인류의 집단무의식에 내재된 구원자 원형이

현실 속에서 경험되는 위대한 인물의 표상이다.

모세는 아니마의 인도로 만난 부성원형을 통해 구원자 원형에 접근했다.

그 구원자 원형은 모세로 하여금 신의 불꽃으로 인도한다.

타지 않는 불꽃은 모세 내면의 타오르는 열정이요 꺼지지 않는 에너지.

오직 모세만 볼 수 있는 불꽃은 동시에 자아와 자기를 만나게 하는 중재자요,

자기가 보낸 정서적 열정이다.

이처럼 소명은 자아가 자기를 만나는 시점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실존적 한계성 안에서 존재하는 자아는 자기의 요구를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자아는 다른 인격들과 더불어 전체 정신인 자기를 만나야 한다.

 

모세의 소명은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에서 출발한다.

희망과 비전, 더 나아가 소명은 이처럼 현재를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열망,

즉 변화를 추구하는 생명본능에서 출발한다.

결국 희망과 소명의 부재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

변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의 유일한 목적이요, 그것은 생명유지를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은 죽음을 극복하게 하는 유일한 생명력이다.

모세의 소명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첫째, 소명에 대한 인식과 거부 단계

호렙산에 올라간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대면한다.

그 타지 않는 불꽃은 인간과 신, 자아(ego)와 자기(self)의 만남을 주선하는 중재자다.

그 불꽃은 영원히 타지 않는 내면의 열정이요, 소명의 길을 가게 하는 원동력이다.

모세의 소명은 자신이 인식하기를 거부했던 동족의 박해상황에서 출발한다.

내 백성의 고통을 보았다는 신의 음성은

마치 자기가 자아의 고통을 처절하게 경험한 것과 같다.

인간의 고통을 신이 경험할 때, 신과 인간은 하나가 된다.

부모가 자녀의 고통을 인식하고 경험할 때, 그들은 하나의 정신 안에서 해법을 찾는다.

모세의 소명은 억압과 박해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애써 부인해 오던 현실을 신이 일깨워준 사건이 소명이다.

그것은 자아가 깊은 내면에 있는 자기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다.

 

자기백성의 고통을 인식한 신은 모세에게

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출애굽기 38).

모세의 반응은 한마디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모세는 이렇게 변명한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여 혀가 둔한 자입니다”(출애굽기 410).

이에 대한 하나님의 해법은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의 입을 대신해줄 아론을 내세우겠다.”는 것이다.

아론은 언변이 능한 사고형인 반면, 모세는 감정 기능이 발달한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아론은 모세의 숨은 자아이자, 모세의 언어 능력을 보상해 준다.

희망과 비전이 다가올 때 자신도 모르게 그로부터 멀어지는 심리는

혼자서 그것을 감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인적 차원의 희망이라도 그것을 혼자 성취하기 어려울 때

자신도 모르게 움츠러들며,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그 희망으로부터 멀어진다.

대상과의 신뢰관계를 형성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일수록 혼자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들에게는 함께 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상담자의 우선적 과제는 내담자와 함께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내담자의 숨겨진 자아를 찾아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모세 안에 아론이 숨겨져 있듯이, 누구에게나 제 2, 3의 자아가 있다.

2, 3의 자아를 찾아내는 것은 의식의 확장일 뿐만 아니라,

자아기능을 강화시킴으로써 고독과 외로움의 함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작업이다.

 

대상추구야 말로 인간의 기본적 본능이라고 주장하는 대상관계 학파의 견해처럼,

인간은 어느 정도 대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누군가와 함께 정서적 교류가 있을 때, 자신의 존재는 확인되며 살아있는 생명체가 된다.

혼자 충분히 홀로서기를 하는 사람조차도,

혼자 있음에 대한 고독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일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상담현장에서의 함께함은 내담자에게 마치 신이 함께 해주는 느낌을 줌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둘째, 개인적 콤플렉스와 그림자 극복 단계

모세에게 이집트의 파라오는 콤플렉스이자 그림자의 표상이다.

이방인으로서 이집트의 왕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멀어진 모세에게는

이집트 왕은 자신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콤플렉스로 작용한다.

동시에 이집트 왕은 모세와 이스라엘의 앞길을 가로막는 장애요인이다.

그것은 마치 자아의 길을 가로막는 그림자와도 같다.

노예상태에 있는 이스라엘은 모세의 자아상을 대변한다.

헐벗고 굶주리고 박해당하며 연약해진 이스라엘의 자아상은

그들을 대변하는 모세를 통해 새로운 자아상으로 변모해야한다.

이를 위해 이전의 상태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에게 혐오의 대상이자 모든 것을 공급하는 거대한 세계이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박해하는 모성의 이중적인 모습과도 같다.

모성의 품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이스라엘을 가로막고 있는 실체는 이집트의 왕으로 나타난다.

모세는 그와 함께 맞서 싸워야 한다.

 

모성적 지배원리는 자녀의 독립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독립은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한 개인, 한 자아가 집단의 거대한 힘과 대적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리비도와 소통하는 자기(self)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은 신의 함께하심과 초월적 도움으로 드러난다.

이집트에 내려진 열 가지 재앙과 이집트 왕의 완강한 거부는

자아와 그림자 사이의 갈등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만성적 방어기제로 나타나는 그림자의 속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인격의 통합을 바라는 자기에 대한 그림자의 반항이기도 하다.

보다 성숙한 인격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기(self)의 방향과

이전의 사고방식에 안주하면서 적당히 타협하려는 그림자는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통해 그 타협점을 찾는다. 자아는 이 기간을 잘 견디어 내야 한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자신의 콤플렉스를 인식하고

그림자와 대면할 수 있도록 기다리면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셋째, 원형적 콤플렉스 인식과 수용단계

모세는 파라오를 인식하고 그의 완강한 저항을 물리치고 드디어 독립을 선포한다.

독립은 에덴동산에서 선포되는 것이 아니라 황량한 광야에서 선포되어야 한다.

그것은 고난을 받아야만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적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모세와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다른 할 일이 있다.

심리적 차원에서 살펴보자. 모세 이야기를 주관적 관점에서 볼 때,

모세와 함께 등장한 인물들은 그의 또 다른 인격들이다.

희망과 비전, 그리고 소명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적 인격들과의 화해와 통합이 필요하다.

모세는 광야에서 보다 심층적인 원형의 세계로 들어간다.

원형의 세계, 즉 집단무의식의 세계는 마치 태곳적 밀림과도 같은 곳으로서

머나먼 인류의 조상이 겪었던 원초적 경험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인에게 마치 황량한 사막처럼 느껴진다.

여기서 모세는 다시 한 번 자신의 영혼인 아니마를 만난다.

이전에 십보라의 모습으로 긍정적으로 나타났던 그의 아니마는

어느덧 부정적인 아니마로 변해있다.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은 여자 예언자로서 모세의 권위에 도전했다.

자신도 모세처럼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미리암이 모세의 아니마가 투사된 대상이라면, 그녀는 모세의 팽창된 인격을 보여준다.

자신만이 하나님과 직접적인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모세의 우월의식은

미리암의 감상적 과대자기로 드러난다.

따라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그 어떤 시도도 용납될 수 없다.

그것은 합리적인 판단에 근거하기 보다는 다분히 감상적이고,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도록 유혹하는 그림자의 장난에 기인한다.

모세의 자아팽창은 금송아지 사건에 드러난다.

모세가 율법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사이에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스라엘이 만든 금송아지는 신의 대리자였던 모세를 대표한다.

금송아지는 신의 대리자로 여겼던 모세의 자기표상이 투사된 대상이다.

이처럼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은 어느 정도 무의식적 속성이 있다.

자아가 무의식에 사로잡힐 때 자신을 보지 못하고 신과 동일시된다.

모세는 이런 과정을 통해 미리암을 수용하고,

금송아지를 만든 백성과 함께 회개함으로써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한다.

광야에서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백성들은

모세의 소명과 개성화의 길을 방해하는 무의식의 어두운 그늘과도 같다.

모세는 광야생활을 통해 보다 깊은 심층의 세계에서

부정적인 인격들과의 만남과 화해를 통해 소명의 길을 갈 수 있었다.

 

넷째, 자신의 한계설정과 자기수용단계

모세의 소명은 이루어졌는가? 모세의 소명은 어디까지인가?

우리의 희망과 비전, 그리고 소명의 끝은 어디인가?

희망과 욕망의 끝은 보이지 않지만, 소명의 끝은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다.

희망과 욕망은 본능적 욕구와 자아이상에 토대를 두기 때문에 그 끝을 헤아리기 어렵다.

그러나 소명은 자기(self)와의 연대로 인해 발생하는 과업이기에 그 끝은 자기에게 달려있다.

자아(ego)는 자기(self)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아가 자기의 뜻을 어기고 계속 전진할 때, 그것은 소명이 아니라 욕망으로 전락한다.

모세의 소명은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소명의 과정과 함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모세의 소명이자

그와 함께 하는 다른 이들의 소명이다.

이미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소명의 본질은

공동체와 집단, 더 나아가 인류의 전체 정신에 동참할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

소명이 개인적 콤플렉스와 욕망의 지배 아래 있게 되면, 이미 소명으로서의 가치는 상실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려는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중도에서 그 임무를 마쳐야 한다.

그것은 소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소명의 여정에 참여하는 한 개인의 운명이다.

 

소명은 개인이 집단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개성화의 여정이다.

그것은 자아가 자기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열정이요 결단이다.

자기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정신세계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신의 영역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억압과 박해,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 모세의 소명은

원대한 목표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부분적인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그것은 전체 인격인 자기(self)에게 굴복하는 자아(ego)의 거룩한 결단이다.

자아는 무한한 이상을 좇아가기 보다는,

적절한 선에서 멈추어 서서 지금까지의 자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할 때 아름답게 변모한다.

 

다음시간에는 5. 갈등의 심리학 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