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넨베르크 설교04_광야를 건너(신명기 8:10-19)

2019. 12. 4. 02:12아는목사

https://youtu.be/sCprEWDu7sA

 

광야를 건너

8:10-19

 

광야는 생명을 위협합니다. 광야는 갈증과 허기로 여행자들을 위협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거쳐야만 했던 그들의 길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도움만을 의지했습니다. 바위에서 물의 원천을 만드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늘에서 내려주시어 양식을 삼게 하신 그 하나님을 말입니다. 그래서 예언자 호세아는 그 광야의 유랑 시절을, 비록 그때가 위기의 시절이었지만, 향수 어린 말로 이스라엘 민족과 하나님의 약혼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광야시절은 하나님을 향한 모반과 배척의 시절이었으며, 황금 송아지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대로 하여금 결코 안식할 곳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하셨습니다. 이 안식할 곳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결국 그들의 조상과 맺으셨던 자신의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는 약속하신 대로,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려주신 대로 이 민족을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5장에서 설교자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현재의 행복에 머물지 말고 그것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잊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계명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광야의 궁핍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그 광야에서 구원받은 그 사건을 기억해야만 합니다(8:10-19).

우리 인간들은 위기에 처하면 하나님을 찾지만 행복한 시기에는 하나님을 잊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서 나이가 든 분들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다음에 교회마다 사람들로 가득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민족은, 또는 그들 중에서 살아남은 어떤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최악의 재앙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 재앙은 우리 민족 스스로 잘못해서, 하나님을 기피해서 야기된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하나님에게, 그리고 기독교 신앙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다시 비었으며, 매년마다 그 현상이 매우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던 위기의 시절은 잊혔습니다. 그리고 지난 십 년 간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대개의 사람들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재산은 내 손으로 뼛골이 빠지게 일해서 모은 것이다.”(8:17).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모든 지상의 행복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바로 그런 말씀을 들어야 할 똑같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행복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망각하고 맘몬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두려운 위협이 즉시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를 잊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 섬기고 예배한다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다짐한다. 너희는 반드시 망할 것이다.”(8:19). 신명기가 공식적으로 선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말씀은 그대로 적중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에게 정복당하고 파괴되었습니다. 그 민족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일어난 이런 경험, 또는 이와 비슷한 경험 때문에 히브리서는 이렇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결정적인 안식을 주는 곳이 되지 못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고, 또한 하나님이 창조를 끝낸 후에 쉬셨던 것처럼 그 안식에 참여할 수 있는 그런 곳이 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구원의 선물로 생각했습니다. 원수 앞에서도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구원의 선물 말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그 사실을 부정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행복에 겨워 하나님을 늘 망각하고 그의 은총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광야는 연장된다는 뜻입니다. 문화 세계에 있는 풍요로운 삶은 영적인 삶이 위협받는 광야로 변합니다. 거기서 인간의 영혼은 목말라 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은 허무주의의 광야에, 마음과 이성의 공허에 빠져듭니다. 그래서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과 그의 계명, 법령, 규정을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인간이 더불어 살기 위해서 도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에 대한 위임이 주어졌습니다. 이 말은 곧 그것이 결여되는 사태에 대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그런 윤리적 위임이 오늘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강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허무주의의 광야에는 진리가 없으며, 구속력 있는 가치나 규범도 없습니다. 위인의 용기가 우리를 훨씬 강렬하게 감동시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광야 설교자의 용기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광야는 자란다: 광야를 숨기고 있는 자에게 재앙이 내리리라!

! 위로 오르라, 기품을 가지라!

미덕을 지니라! 유럽인의 기품을!

힘차게 불고, 불어라, 미덕의 풀무여!

!

다시 한 번 울부짖어라, 도덕적으로 울부짖어라!

도덕적 위인이 광야의 딸들 앞에서 울부짖듯이!

미덕의 포효, 모든 이의 사랑을 받는 소녀,

모든 유럽인의 열정보다,

모든 유럽인의 갈망보다 더 큰!

바로 거기에 나는 이미 가 있네, 유럽인으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아멘!

광야는 자란다: 광야를 숨기고 있는 자에게 재앙이 내리리라!

 

도덕주의의 유럽적 기품은 구약성서에 그 근원이 있습니다. 도덕에 대한 위인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허무주의의 광야는 계속해서 자랍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말한 대로 인간은 바로 그 광야를 자기 자신 안에 숨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그 광야에서 죽은 이후로 말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단지 민족을 향해서 도덕을 설교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도덕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뒤로 수세기 동안, 그리고 최근 2천년 동안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땅을 빼앗겼으니까 말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설교자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를 기리고 그에게 감사하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분명히 계명을 지킨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즉 우리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참된 생명을, 즉 우리의 기쁨이 되는 그런 생명을 생산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유대인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우리를 죄와 죽음의 공포라는 광야에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심으로써 우리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행위를 생각해야하고, 우리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함께 모임으로써, 또한 예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성만찬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재 함께 하십니다.

전체 예배는 하나님을 새롭게 생각하는 것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를 새롭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 읽기, 설교, 찬송, 모든 예전 등은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며, 그가 우리에게 행하신 것과 행하실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찬양과 감사로 이끌어 들입니다. 이 찬양과 감사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다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만찬을 시작하시면서 유대인들의 습관에 따라서 하나님에게 감사 드렸습니다. 그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통치의 구원이 이미 개시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그의 죽음을 마음에 새기려고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마음을 통해서 그의 공동체에 현재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현재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죽음을 뛰어넘는 생명을 우리에게 보증하며, 또한 그의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안식을 우리에게 보증합니다. 우리는 그 안식을 하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이제 우리도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로부터 안식을 얻습니다. 이전에 활동했다면 이제 그 활동으로부터의 안식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고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계명과 법령과 규정을 지키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으로 활동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가,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행위가 우리를 죄와 죽음의 광야로부터,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의 광야로부터 구원합니다.

매일 찬양과 감사를 드리면서, 동시에 공동의 예배를 드리고, 특별히 성만찬을 거행함으로써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고 그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때까지 광야를 여행하기 위해 필요한 노자입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 능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아멘.

(1994.2.13, 뮌헨, 마르쿠스 교회, 대학 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