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드릭 비크너 설교 03) 별들에 담긴 메시지_빌 3:12-4:7

2019. 11. 2. 04:26아는목사

 

https://youtu.be/xdEb9Im-870

 

별들에 담긴 메시지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3:12-4:7)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신다면,

도대체 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시지 않고

우리를 이렇게 끔찍이 불확실한 상태로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그분의 얼굴을 드러내시어

절망하는 세계가 마침내 소망을 갖도록 해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보는 질문입니다.

모종의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하고 확실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 모두가,

신자들뿐 아니라 불신자들도 원하는 바가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정말 그런 일을 하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끔은 궁금해집니다.

하나님이 반박할 수 없는 극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신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예를 들어 생각해봅시다. 여기 아래서 보면 밤하늘을 가로질러 흐르는

크고 흐릿한 은하수가 눈에 들어오지요.

하나님이 은하수를 좀 더 밝게 빛나게 만드신 후

그 배열 순서를 바꾸신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을 때

흔히 보던 제멋대로 흩어진 별들이 아니라

수 광년 크기의 글자로 적혀 있는 이런 문장을 보게 된다고 합시다.

나는 정말 존재한다(I REALLY EXIST).’

또는 하나님은 있다(GOD IS),’

제가 이런 사건에 대한 이야기나 희곡을 쓰게 된다면

당연히 첫 장면을 이렇게 시작할 것입니다.

어느 날, 이 거대한 신학적 선언이 표제처럼 별들 속에 나타났다.

해와 달들이 I의 점을 이루고 여러 혜성의 꼬리들이 t의 가로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의 여러 반응을 상상해서 보여줄 것입니다.

그 중에는 무릎을 꿇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딱히 종교적인 부류로 설정된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라

그런 상황이라면 그런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울 테니까요.

그들은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고 뒤의 키 큰 풀밭에 허물어지듯 무릎을 꿇을 것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집으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도 등장할 것입니다.

죄 지은 사람들은 심판이 두려워서 그럴 테고,

세련된 사람들은 그 삭막하고 끔찍한 단순함이 무서워서 그러겠지요.

하나님은 있다라는 문장이 반짝이는 별들 가운데 떡하니 적혀 있으니까요.

갑자기 자신을 알린 미지의 존재, 그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광대함을 본 사람들은

아마도 상당히 두려움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후회의 눈물을 흘릴 겁니다.

이제 알게 된 사실을 전에 알았더라면

전혀 다르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겠지요.

또 많은 사람이 불쑥 솟아오르는 희망을 느낄 것입니다.

병들어 침대에 누운 채 잠 못 이루며

침실 창으로 하늘을 올려보는 노인이 그럴 겁니다.

얼마 안 남은 그의 시간이 탁자 위에 놓인 시계의 똑딱거림과 함께 흘러가고 있지만,

그는 하늘에서 시간을 넘어선 현실의 증거를 봅니다.

그리고 저는 설교자들과 신학자들이 느낄

특이한 놀라움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다룰 것입니다.

그들은 평생을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대단히 주의하지 않으면 그들의 하나님은 현실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형이상학적 사변의 한 가지 주제로 전락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밤중에 일어난 이 일은 그들에게도 엄청난 확증이 되어줄 테고,

결국 자신들이 옳았음을,

이제껏 그들이 믿어 온 것보다 훨씬 더 옳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이함에 놀라겠지요.

 

이 이야기에서 저는 하나님이 세상에 그분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 증거를 보여주실 때 찾아올

초기의 놀라운 충격을 보여주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축구경기장과 노지에서 예배를 드릴 테고,

전쟁이 그치고 범죄도 중단되고 으스스한 침묵이 세상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반전이 될 만한 내용을 암시해야

정직한 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몇 년이 지나가고 하나님을 알리는 증거는

여전히 매일 밤 모두가 볼 수 있게 빛날 것입니다.

그 메시지가 백만분의 일 확률로 우연히 만들어진

자연적 산물이 아니라는 확신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기 위해,

저는 하나님이 다른 언어로 그것을 계속 다시 쓰시고

때로는 원색으로 빛나게 하시거나

천상의 기운이 가득한 음악을 곁들이신다고 설정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장 완고한 회의주의자조차도

하나님이 참으로 존재하신다고 믿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야기의 막바지에 이르면 저는 이런 식으로 끝맺고 싶습니다.

어느 날 한 아이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볼에 풍선껌을 잔뜩 집어넣고 씹는 흔해빠진 아이입니다.

이것이 영화가 된다면 저는 별들이 반사된 아이의 눈을 클로즈업할 테고,

아이가 하늘의 메시지를 한 음절씩 발음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날 밤에는 하늘의 문구가 마침 프랑스어로 적여 있다고 해봅시다.

“J'existe quand-même. C'est moi, le bon Dieu.”

하늘 저 멀리서는 늘 들리던 숭고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그때 저는 아이가 아버지를 쳐다보거나

아이 특유의 말도 안 되는 용기를 발휘해 하나님을 쳐다보게 만들 겁니다.

그리고 아이의 입에서는 천사도 숨이 턱 막히게 만들 말이 나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게 어떻다는 거에요? 그렇다고 뭐가 달라지나요?”

그리고 메시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영원히 사라지고

천상의 음악은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후 몇 세기 동안 계속될 수도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달라지는 것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확신을 갖기를 바라고, 그래서 증거를 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그런 증거, 모든 의심을 일순간 잠재워줄

과학적, 철학적으로 입증 가능한 증거는

결국 무섭도록 깊고 깊은 우리의 필요에 답해주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별들의 차가운 빛 너머에 우주의 운행을 책임지는

모종의 우주적 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바로 여기 매일매일의 치열한 삶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님은 저 멀리 별들 속에

그분에 대한 메시지를 적지는 않으시지만,

여기 아래서 세상의 향기로운 혼란과

비참함과 경이에 무릎까지 빠져 살아가는

눈먼 우리에게 이런저런 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객관적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 임재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 경험을 종교적 언어로 표현하고 말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로 추구하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는 우리가 정말 목도하게 되는 기적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가 스스로 인정하는 정도보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생각하는 정도보다

하나님에 대해 훨씬 많이 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 우리가 깨닫기로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말씀하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매일 저녁 해가 지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대단히 인격적이고 모를 수 없는 방식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별빛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 메시지로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메시지는 매일매일의 단조롭고 혼란스러운 사건들 안에

우리 각 사람을 위해 적혀 있습니다.

그 메시지야말로 결국에 가서 모든 것을 바꿔놓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저나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지,

어떤 순간을 선택하여 그 말씀을 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늘은 거룩한 신비가 됩니다.

매일이 거룩한 신비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늘 말씀하시는

몇 가지가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모든 사람 안에는 일종의 공허함이지요.

뭔가가 빠진 느낌, 동요, 우리 안의 모든 것이

엉망이 된 듯한 심각한 느낌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그것을 불안이라 부르기도 하고

신학자들은 소외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어떻게 부르건 그 경험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불안의 시대, 상실의 세대, 패배의 세대, 외로운 군중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우리 시대에는

더더구나 다들 그 경험을 이해할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 이런 공허하고 불편하고

불완전한 느낌이 자리 잡고 있는데,

저는 이것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하는 설명을 받아들인 세상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침묵,

그분의 부재를 통해 가장 분명하게 말씀하실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리워함으로써

그분을 가장 잘 알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행하고

어떤 존재가 되기를 바라시는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저는 바로 이 영역에서 우리가 스스로 인식하는 것보다

하나님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는다고 믿습니다.

거리에서 한 얼굴이 우리를 향해 다가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쳐다봅니까, 아니면 못 본 체하고 말없이 지나갑니까?

어떤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 대해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잔인하고도 재미있어서 모두가 웃습니다.

우리는 같이 웃습니까, 아니면 진실을 말합니까?

친구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면 그를 증오하는 데서 즐거움을 느낍니까?

사랑뿐 아니라 증오에도 즐거움이 따라오니까요.

아니면 어설프지만 다시 작은 다리를 놓으려 시도합니까?

때로 우리가 혼자 있을 때, 머릿속으로 생각들이 벌 떼처럼 밀려듭니다.

그중에는 파괴적이고 추하고 자멸적인 생각들이 있고,

창조적이고 기쁜 생각들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생각을 선택합니까?

오늘 하루 용감하게 살아갈까요, 거짓말쟁이가 될까요?

아주 작은 정직도 분명 정직입니다.

오늘 하루 누군가의 친구가 될까요, 아니면 얼음장처럼 차가운 사람이 될까요?

 

온갖 별 볼일 없는 만남, 결정, 내면의 싸움들이 모여

우리의 하루하루를 구성합니다.

그것들을 다 합쳐봐야 대단치는 않지만 한편으로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나날들은 보잘것없는 일들로 가득하지만,

하나님은 바로 그 보잘것없는 나날들 속으로

대단히 의미심장한 말씀들을 들려주십니다.

별들 사이에 쓴 말씀이 아니라 날것 그대로이자

보잘것없는 일들로 가득한 우리의 나날 속에 적어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아가는 매일의 한복판에 말씀하시므로

그 하루하루는 허튼 나날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각 사람에게 다르게 들려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담대하여라, 긍휼을 베풀어라, 내 어린양들을 먹여라, 푯대를 향하여 달려라

그러나 우리의 나날이 모두 사소하고 일상적이고 보잘것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끔은 위기도 찾아옵니다. 여러 나라로 이루어진 거대한 세계와

개인의 작은 세계 모두를 토대까지 뒤흔드는 위기입니다.

하나님은 위기상황들을 통해서도 다양한 말씀을 전하십니다.

때로는 다른 말씀들과 확 구분되는 말씀도 있습니다.

제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세계를 소멸시킬 것 같은 거대한 국제적 위기입니다.

개인적 위기로 말하자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실패와 배신과 우리 내면의 평화를 위협하는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이 기다리는 로마로 가는 길에

감옥에서 써 보낸 편지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저는 이것이 우리 시대의 큰 위기와 개인의 작은 위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강한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시대의 끔찍한 죄들로 인해

우리도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 닥칠 일들로 인해 두려움과 불길한 예감에 떨다가

기절할 지경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주께서 가까이 계십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들려주시는 말씀들이 진정한 기적입니다.

이 말씀들은 우리가 별들 가운데 적힌 메시지에 대해 기대하는 것처럼

믿음을 만들어내는 기적은 아닙니다.

이 말씀들은 믿음이 있어야 보이는 기적입니다.

개방성이라는 믿음, 이 세상 속,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을 고대하며 기꺼이 기다리고 지켜보고

귀 기울이는 자세라는 믿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