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란 무엇인가(Anima & 대극) 개꿀리뷰 15

2019. 7. 29. 01:55개꿀리뷰

https://youtu.be/Y2gZDEEfr60

 

 

여자란 무엇인가(Anima對極)

 

우리는 춥고 배고프고 졸릴 때 거지가 따로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의식주 문제의 결핍에 따른 고백은 아닐까?

그런데 의식주 문제보다 근원적인 인간의 욕구가 있다.

물론 의식주 문제와 중첩되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본능적으로 먹고 자고 싸고 싶은 욕구가 있다.

그 먹고 자고 싸고 싶은 욕구를 한방에 해결하는 방법은

바로 여자를 만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이유가 전부가 되거나 우선이 된다면 곤란하겠지만

그러나 그러한 부분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부분을 결코 간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말 그대로 먹고 자고 싸야만 인간은 살 수 있다.

그러나 감정을 느끼고 이성을 가지고 삶에 신념이 있는 사람에겐

먹고 자고 배설한다는 것에 보다 깊은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다.

그래서 정서적으로 먹는다는 것은 생존의 문제와 이어지고

잔다는 것은 불안의 문제 그리고 배설은 욕망의 문제로 의미가 재해석되어 왔다.

그래서 여자들은 남자를 만나 생존의 문제와 불안과 욕망의 문제를

감당할 수 있고 해결해 줄 수 있는 믿음직한 사람을 찾게 된다.

남자라고 다를까? 사냥을 해오면 요리를 해주고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주며

여자에게 끊임없이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자는 사랑받고 싶고 남자는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먹고 자고 배설한다는 것에 대한 해석은 사회적 차원에서

생존을 위한 협동과 불안을 넘어서서 사회적 안녕과 평화

개인적 욕망에서 집단적 소명과 사명으로 그 의미는 확장되고 재해석되어 왔다.

마찬가지로 남성 안에 존재하는 여성성 즉 아니마(Anima)

그 해석의 지평이 확장되어 왔다.

 

융 심리학에 따르면 아니마의 첫 번째 단계는 하와(Chawwa)이다. 말 그대로 본능적이다.

여자를 성적으로만 보거나 대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의 수준은 아닐까?

이러한 에로틱한 하와의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는 헬레네(Helene)이다.

쉽게 말해서 로맨틱한 단계다. 여전히 성적이긴 하지만 그 가치와 의미가

본능에서 정서로 확장되었다. 하와가 순수하게 충동적인 단계였다면

헬레네의 단계는 미적이고 그 존재 자체로 개성적인 가치를 인정하는 단계다.

생물학적이고 오직 생산성에 입각한 하와에서 정서적이고 개성적인 헬레나

이어서 다음 단계는 성모 마리아(Maria)의 단계다.

드디어 섹슈얼한 성이 성스럽게 변모한다.

마리아는 아가페의 단계이자 박애의 단계로 헌신적이며 영적인 어머니 상이다.

에로스에서 시작된 아니마는 로맨스를 거쳐 플라토닉한 로고스가 된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천상적이고 종교적인 마리아상을 거쳐 아니마는

영원한 여성성으로 연금술의 지혜의 여신인 소피아(Sophia)의 단계로 나아간다.

이러한 사피엔치아(Sapientia) 경지에 이르는 일은 사실 거의 없으며

마리아는 신격화된 여성이라면 사피엔치아는 여신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니마의 단계를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여자

내가 지금 그리고 있는 여성성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닐까?

결국 끼리끼리 만난다고, 물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경계해야한다.

,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여자가, 나랑 같이 살고 있는 여자가,

내가 만나고 있는 그 여자가 어쩌면 나의 아니마의 투사체이며

그 아니마의 수준이 바로 나 자신의 수준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하와같은가?

그럼 내가 바로 그 충동적이고 성적으로 탐하는 아담일 것이다.

지금 나랑 살고 있는 여자가 헬레나같은가?

그럼 내가 바로 딱 그 수준의 남자일 것이다.

나는 안 그런데 그녀가 수준 미달이라고?

정말로 당신이 그녀보다 한 단계 성숙했다면 수준 미달이라고 판단하기보다

상대방의 결핍을 채워주고 욕망이 광기가 되지 않도록 북돋아주고 맞잡아 주었어야 했다.

 

아니마의 단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니무스(Animus)도 단계가 있다.

아니무스의 첫째는 신체적인 힘이나 물리적인 힘으로 드러나는 타잔의 단계라고 한다.

둘째는 주도권을 갖고 계획된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셸리(Shelley)와 같은 낭만적인 남성이 이에 속한다.

셋째 단계는 말씀, 즉 로고스의 사자로 교수나 목사의 상으로 나타나며

위대한 정치웅변가인 로이드조지(Lloyd George)가 예로서 제시된다.

끝으로 네 번째 단계는 의미의 구체화로서 종교적 체험의 중개자로 대변된다고 한다.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남자가 타잔과 같은가?

그럼 내가 바로 하와 같은 여자일 것이다.

지금 나랑 살고 있는 남자가 셸리같은가?

그럼 내가 바로 딱 그 수준의 여자일 것이다.

 

사람들이 누구랑 싸운다고 생각하는가? 적이나 원수, 나쁜 놈이나 악마일 것 같은가?

경험과 관찰을 토대로 사람들은 비슷한 사람이나 가까운 사람과 대부분 다툰다.

내가 끊임없이 제거하고 싶고 꼴도 보기 싫은 것은

어쩌면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그 대상이나 존재가 아니라

나의 그림자, 즉 자신의 어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어두운 그림자마저도 나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때

치유의 역사는 시작되고 삶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으며

보다 삶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나는 나의 생물학적이고 본능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여자를 만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낭만과 이상에 빠져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가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어쩌면 나를 비추고 있는 거울이자

내가 숨기고 싶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대극의 메아리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