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심리학과 성서적 상담_정신이란 무엇인가?

2020. 4. 25. 22:07개꿀리뷰

https://youtu.be/LLUKsHJoVaQ

 

정신이란 무엇인가?_의식과 무의식(심리학 북리뷰)

 

오늘은 무엇인가 시리즈 중에서, 지금까지 좀 보편적이고 보다 편한 접근에서

이제는 살짝 깊이 있는 차원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정신이란 무엇인가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개념 이해를 돕고자 준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제 영상 중에 종종 셀프니 자아니 페르소나 콤플렉스 등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지만 정의하라고 하면 뭔가 어지러운 그것들을

오늘처럼 가끔씩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구독잊지 마시구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살다보면 정신머리가 없네”, “정신줄 놓았다라는 말들을 듣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 정신(psyche)은 무엇일까요?

시대와 문화 그리고 사상적 배경에 따라 그 정의는 달라질 것입니다.

어떤 단일한 단위로 정신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정신은 마치 큰 가마솥과 같아서 그 안에 서로 상반된 충동, 금지

혹은 감정이나 정동들이 한데 섞여 있습니다(CW 9i, par. 190).

정신은 이런 복잡한 요소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실체를 드러내며

나이, 성별, 기질, 태도, 본능적 성향 등에 따라 그 표현양상은 달라집니다.

인식의 주체로서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는

모든 심리적 과정의 총체입니다(CW 8, par. 261, 408 참조).

 

그렇다면 정신은 어떤 구조로 되어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을 어떤 일정한 구조를 통해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문적인 혹은 치료적인 차원에서 다양하게 설명되어 왔습니다.

무의식의 심리학을 처음으로 체계화시킨 프로이트(S. Freud)는 정신구조를

일단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구조로 설명했습니다.

무의식은 과거의 경험에서 파생된 억압적인 요소로 구성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와 달리

융은 알려지지 않은 억압적 내용뿐만 아니라 정신의 본능적 요소

그리고 각 개인의 행동과 태도의 기본적 형식을 담고 있는 원형들이

무의식의 내용을 형성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칼 구스타프 융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의식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편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신적인 것

즉 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적 내용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성질을 지닌

정신양(psychoid)의 체계도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정의되는 무의식은 매우 불안전한 사실을 기술합니다.

즉 내가 알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은 모든 것

언젠가 의식했지만 이제는 망각된 모든 것

내가 의도 없이 주저하지 않고, 다시 말해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고

하고자 하며 행하는 모든 것, 내 안에 준비되어 있어 나중에야 비로소

의식에 나타나게 될 모든 미래의 것, 이 모든 것이 무의식의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이 내용들은 모두 어느 정도 의식될 수 있거나

적어도 언제가 한 번은 의식되었고 바로 다음 순간에 다시 의식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의식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언젠가 표현한 대로,

의식의 언저리입니다(CW 8, par. 382; KGW 2, 44).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융은 1928년에 인도했던 꿈분석 세미나에서

정신구조를 다음과 같은 그림을 통해 설명했습니다(DA, 51).

이 그림에서 자아(ego)는 왼쪽 의식의 중심에 있습니다.

의식의 주체로서 자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 외에도 부분적으로 유전된 기질과

알려지지 않은 무의식적 내용에 의해 구성된 복합체입니다.

인식의 여러 과정들이 상호작용하면서

그 내용이 자아의식(ego-consciousness)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융은 자아라는 용어보다는

자아 콤플렉스(ego-complex)라는 용어가 더욱 실제적이라고 말합니다.

융은 의식, 자아, 자아 콤플렉스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의식은 자아와 연합된 상태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점은 자아입니다.

그렇다면 자아는 무엇입니까?

전체 모습에서 보면, 분명히 자아는 매우 복합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은 내외적인 자극을 전달하는 감각작용으로부터 기록된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자아는 과거의 과정에서 파생된 이미지들의 거대한 집합체로 구성됩니다.

이런 모든 복합적 요소는 그것들을 한데 묶는 강한 응집력을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의식의 자산으로 인정해 왔습니다.

따라서 의식은 자아를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나 자아 없이 의식 또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확실한 대조는 아마 자아를 하나가 아닌

여러 과정들의 반영으로 간주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여러 과정들의 상호작용과 그 내용이

자아의식(ego-consciousness)을 이룹니다.

그 다양성은 실제로 통일성을 이룹니다.

왜냐하면 의식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가 일종의 중력으로 작용하여

여러 부분을 한 방향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소위 사실상 중심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방향으로 모아집니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나는 단순히 자아보다는 자아 콤플렉스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아가 유동적인 복합체로서 변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자아일 수는 없습니다(CW 8, par, 611).

 

이 그림에서 개인(individual)으로 표기된 자기(self)는 정신의 중심에 있습니다.

경험적 개념으로서의 자기는 정신현상의 전체 영역을 의미합니다.

자기는 의식뿐만 아니라 무의식의 영역까지 포괄하는 통합된 인격입니다.

따라서 자아가 인식하는 인격은 부분적 인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초월적 기능은 자아를 비롯한 모든 인격적 요소와 교감하여

정신을 통합된 상태로 이끕니다(CW 6, par. 789).

자아가 자기를 인식하는 과정은, 부분적 인격이 전체 인격 안으로 통합되어 가는 것으로

개성화(individuation)를 위해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의식의 외부에 외적(사회적) 인격인 페르소나가 있으며

내적 인격인 아니마는 페르소나의 대극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아니마는 종종 페르소나를 통해 자신의 정체를 간접적으로 드러냅니다.

원의 왼쪽 반을 차지하는 의식과 개인무의식은 개체발생적으로 획득되어

발전된 부분으로서 정신의 상부를 포괄합니다.

반면에 집단무의식은 정신의 하부기능으로서

개인을 초월한 모든 인류의 보편적 무의식입니다(KGW 3, 43).

융이 제시한 이 그림에서 눈길을 끄는 점은 그림자가 집단무의식 안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림자는 집단무의식에 그 원형적 뿌리를 두고 있으면서

동시에 개인무의식의 내용을 이룹니다.

이것은 모든 콤플렉스의 핵심에는 원형이 있다는 말과 그 맥락을 같이합니다.

융에게서 개인무의식은 원래 의식의 자리에 있었던 것들입니다.

개인무의식은 현실 속에서 억압되었거나 의도적으로 잊어버린 기억들과

고통스런 생각들을 포함합니다.

의식에 의해 충분히 소화되지 못한 어두운 감정(콤플렉스)들이

그림자를 형성합니다(CW 7, par. 103).

개인의 경험과 관련된 그림자 영역이 개인무의식이라면

집단무의식은 원형들(archetype)의 영역입니다.

 

어느 정도 표면에 있는 무의식 층은 명백히 개인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무의식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개인무의식은 개인의 경험이나 습득에 의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있는 더 깊은 층의 토대 위에 있습니다.

이 더 깊은 층이 소위 집단무의식입니다.

나는 집단적(collective)’이란 표현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 무의식이 개인적이 아닌 보편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 그것은 개인적 정신과 달리 모든 개인에게

어디서나 똑같은 내용과 행동양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며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초개인적 성질을 지닌 보편적 정신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CW 9i, par. 3; KGW 2, 105-106).

 

남성의 영혼인 아니마나 여성의 영혼인 아니무스 역시 중요한 원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간이 태곳적 조상에게서 전수받은 원형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집단적 표상입니다.

배우기 이전에 획득한 생각과 느낌과 행동의 틀을 제공하는 원형은

의식화되고 지각됨으로써 그 상(image)이 변화해 왔습니다.

인간 안에 있는 신의 이마고(이마고데이)’로 부르는 원형은

집단무의식의 내용을 이루어 의식에 강력한 영향을 끼칩니다.

원형을 경험하는 방식은 개인의 의식에 따라 다릅니다(CW 9i, pars 5-7).

행동이나 감정 또는 언어가 의식의 의사전달 수단이 됩니다.

이에 반해 무의식은 주로 상(image)을 통해 자신의 의지를 전달합니다.

풍부한 관념과 감정을 포함하는 무의식의 상들은

의식적 태도에 대한 보상적 기능을 수행합니다.

꿈이나 환상에서 드러난 상들은 무의식의 언어로서

의식에 전달하고자 하는 모든 감정과 관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의식의 상들은 의식의 경우처럼 합리적으로 숙고한 산물은 아닙니다.

융은 이런 상들을 예술적 환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무의식은 의식에 대한 단순한 반응세계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독자적인 생산활동을 통해 정신기능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KGW 3, 87-91).

 

정리하면,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인식의 주체로서의 정신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함하는

모든 심리적 과정의 총체입니다(CW 8, par. 261, 408 참조).

무의식이란 무엇입니까?

무의식은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언젠가 표현한 대로,

의식의 언저리입니다(CW 8, par. 382; KGW 2, 44).

그렇다고 무의식이 의식에 대한 단순한 반응세계는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무의식은 독자적인 생산활동을 통해 정신기능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KGW 3, 87-91).

어려운 것을 쉽게 이야기해야 전문가인데(?)

오늘 영상을 통해서 이 정도의 이해만이라도 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시간에는 개꿀 무엇인가 시리즈 자아란 무엇인가

자아와 페르소나를 가지고 영상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찾아주시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