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란 무엇인가? 자아와 페르소나(심리학 북리뷰)

2020. 5. 20. 15:48개꿀리뷰

자아란 무엇일까요?

현실 속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판단하고 인식하는 주체가 곧 자아입니다.

자신을 둘러싼 자연환경, 사회환경, 문화와 종교적 배경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정치적, 경제적 상황 속에서 자신이 가야 할 바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도 자아의 몫입니다.

외부환경과 사회 속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대상들 또한 자아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심지어 자아는 무의식 안에 내재된 내부 대상 혹은 내면 인격과

신비한 관계를 맺는 주체이기도 합니다.

융에 의하면, “의식의 주체인 자아는 콤플렉스 덩어리(complex quantity)로 생성되어

일부는 유전적 성향에 의해, 일부는 무의식적으로 획득된 인상들이나

그 부수적 형상에 의해 구성됩니다(CW 17, par. 169).”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의식활동의 주체인 자아를

충분하게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 앞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막막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대체로 사회속의 역할, 즉 페르소나의 모습을 소개하게 됩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출생과 성장배경

혹은 사회적 지위나 역할들이 자아를 대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표상들은 공동체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과 그들의 평가에 의해

자신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고유하게 느끼고 생각하고, 자신만이 갈 수 있는

내면의 세계로 인도하는 주체가 바로 자아입니다.

 

자아가 의식적 인격의 중심이라면

페르소나는 사회적 작용을 위한 외적 인격으로서 자아의 구성요소입니다.

자아가 어느 정도 일관성을 지닌 개인성인 반면,

페르소나는 일시적이며 변화 가능한 집단적 인격입니다.

페르소나는 적응 혹은 개인적인 편이를 도모하기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기능 콤플렉스(functional complex)입니다.

사회적 기능인 페르소나는 절대적으로 대상과의 관련성에 주목합니다(CW 6, par, 800-801).

집단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는 페르소나는 자아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자아는 철저히 개인성을 담보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아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자아가 모든 의식적 내용들이 관련되어 있는 감정의 복합체라고 할 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감정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의식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인식하고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안에 발생하는 정신작용 가운데

자아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분명하게 알지 못합니다.

결국 내가 느끼는 감정을 대변하는 자아 콤플렉스가 실질적으로 자아를 대신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융은 자아인격이 종종 자기이해와 혼동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자아의식을 소유한 사람은 당연히 자신을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자아는 그에 속한(의식활동과 관련된) 내용들만 알 뿐이지

무의식과 그에 속한 내용들은 모릅니다.

사람들은 사회환경 속에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알고 있는 방식으로

자기지식(self-knowledge)을 측정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실제 정신적 사실들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이런 관점에서 정신은 보통 사람이 거의 알지 못하는

생리적이고 해부학적인 구조를 담고 있는

(body)처럼 행동합니다(CW 10, par. 491).

 

자아가 우리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 몸처럼 작용하는 정신의 일부라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교육이나 상담 현장에서 주로 언급되는

자아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입니까?

자아정체성은 주로 자신의 고유성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자신만이 느끼고 지각하며

고유한 방식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자아라면

자아정체감이나 자아정체성은 확실히 인간 본연의 개인성을 지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체성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는

주로 집단이 요구하는 이상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학생이면 학생답게 굴어라!

좋은 부모가 되어라!

존경하는 교사가 되어라!

사회에 희망을 주는 지도자가 되어라!

이런 식의 주문은 결코 자아의 개인성과 관련이 없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사회(집단)의 요구에 나를 맞추어 가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집단 속에서의 활동은 자아의 결단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타의에 의해 결정된 사회적 역할이라면

그것은 자신의 고유한 개인성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캐스트(C, Kast)는 공동체나 다른 사람이 나에게 요구하는 이미지로부터 구별된

나 자신의 고유한 감정과 자아활동력이 정체성의 토대가 된다고 주장합니다.

 

정체성의 토대는 생명력의 감정과

그것과 가장 밀접하게 결합된 자아활동력입니다.

이는 살아 있다는 감정입니다.

이 감정 속에서 자아로서 삶에서 무엇인가를 이루고 어떤 일을 변화시키며

마침내 자아를 실현시킨다는 가능성이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생명력과 자아활동력, 자아실현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자아활동력은 한 개인이 발달하는 동안

외부 규정에 맞서 점점 자기규정을 확대해 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분명한 인식,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덧붙여 준 것과 대립하고 구별되는

나 자신의 생각에 대한 분명한 인식은 독자적인 정체성을 체험하게 해 줍니다

(Kast, 2007a, 52-53).

 

획일화된 사회제도는 집단의 이상을 대변하기 때문에

개인의 고유성을 수용하지 못합니다.

입시제도를 비롯한 모든 자격고시에 집단의 원리만이 적용될 뿐입니다.

개인성이 상실될 때 인간은 삶의 의미를 잃게 되며

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존재의미를 상실하게 하여

스스로 생명을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현대사회에서 급속도로 증가하는 자살 현상은

자아와 페르소나 사이의 구별이 없을 때 주로 발생합니다.

사회적 체면과 지위 그리고 자신의 전문적인 영역이 무시당했다고 느낄 때

존재감의 상실을 초래하여 자살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회적 인격인 페르소나가 자아를 대신하게 될 때

진정한 자아의 기능은 상실하게 됩니다.

융은 심리치료 현장에서 집단정신을 대변하는

페르소나가 자아와 분화되는 심리적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페르소나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 일종의 집단정신의 가면(mask)입니다.

그 가면은 개인성(individuality)을 가장하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가 한 개인(individual)이라고 믿게 합니다.

하지만 그는 집단정신이 말하는 역할을 단순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페르소나를 분석할 때, 우리가 가면을 벗기면

개인처럼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집단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달리 말하면, 페르소나는 단지 집단정신의 가면에 불과합니다.

근본적으로 페르소나는 실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 사이에서 처신하기 위해 필요한 일종의 타협입니다.

인간은 이름을 얻고, 지위를 획득하며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이런 저런 존재로 비추어집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은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본질적 개인성과 관련해서,

페르소나는 단지 이차적 실체에 불과합니다(CW 7, pars. 245-246).

 

집단의 원리에 잘 적응하는 사람은 소위 유능한 인재가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무능한 사람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병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녀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은 물론 바람직한 일입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가 되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이때 자아존중감이 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신의 자아를 발견하고 자아존중감이 생길 때

자녀 역시 자신의 고유성에 따라 살게 됩니다.

사회적 역할이 자아를 대변할 때 자아상실 상태가 되며

이것은 마치 집단에 함몰된 개인의 표상과도 같습니다.

집단의 이상을 대변하는 페르소나와

의식의 주체인 자아가 건강한 관계를 이룰 때 삶은 풍요롭게 됩니다.

융은 페르소나와 자아가 동일시된 상태는

무의식에 의해 자아가 잠식된 경우와 같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개인을 가면(페르소나)과 동일시하도록 유도하는 한

그는 내면의 영향력으로 인도됩니다.

노자의 말대로, “높은 것은 낮은 곳에 의존합니다.”

대극은 안으로부터 상승합니다.

그것은 마치 자아가 페르소나에 함몰되는 것과 동일한 힘으로

무의식이 자아를 억압하는 것과 일치합니다.

페르소나의 매력에 대항하여 외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은

무의식의 영향력에 반하여 내부적으로 동일한 수준의 연약함을 의미합니다.

외부적으로 영향력 있고 강한 역할이 작용하는 동안

내부적으로 무의식으로부터 올라온 모든 영향에 직면하여

실로 연약한 성향이 발견됩니다.

감상적 상태(moods), 변덕(vagaries), 유약함,

심지어는 맥 빠진 성활동

(결국 발기부전에 이르게 하는)이 점차 지배하게 됩니다(CW 7, par. 308).

 

보다 실질적으로 자아와 페르소나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꿈을 살펴보겠습니다.

 

아내와 함께 여행 중입니다. 한 모텔을 숙소로 정하고 차를 주차해 놓았는데

어떤 남성이 내 차를 자기 차로 알고 가져가 버렸습니다.

우리가 묵은 방은 허술한데, 다른 한 가족이 지내는 방은

매우 고급스럽게 보이고 아이들도 밝아 보입니다.

나는 내 차를 찾으러 가는 것인지 어디로 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어머니께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계십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찾아다니시다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셨습니다.

어머니 손에는 쪽지 신문이 여러 장 들려 있었습니다.

나를 찾기 위해 신문에 광고를 낸 모양입니다.

내가 그 쪽지 신문들을 보자 모두 융에 관한 글들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없고 융에 대한 설명이 가득 찬 쪽지 신문을 들고

어머니는 나를 애타게 찾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꿈을 꾼 분은 이 꿈을 꾸고 큰 충격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고 합니다.

우리가 묵은 모텔 방은 다른 방에 비교해 볼 때 허술하고 값싸게 보였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사실, 여행 중에 우리 부부에게는 작은 방 하나면 족합니다.

그런데도 나는 주변 사람의 화려한 모습에 신경을 쓰고 있던 것입니다.

개인의 편리성보다는 집단의 관점에서 나를 평가할 때 자아는 페르소나에 함몰됩니다.

내 차를 다른 사람이 타고 간 것도 나와 다른 사람이 구별되지 않는

즉 개인과 집단이 구별되지 않는 상태를 보여줍니다.

몸이 나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머니의 모습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융 심리학에 몰두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모성원형으로서 나의 생산성을 암시합니다.

그 생산성이 융심리학에 집중되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마치 융심리학이 나 자신인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요?

페르소나로 대변되는 융심리학이 자아를 대치해 버렸던 것입니다.

융의 사고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지배하게 되었고

사회적 역할을 대변하면서 자아를 상실할 위기에 놓이게 된 심리상태를

꿈이 적나라하게 알려 주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꿈을 꿀 당시에 꿈꾼 이는 당혹감과 더불어 환희를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무의식에 대한 의식의 진심 어린 감사의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페르소나와 아니마/아니무스 사이에는 보상적 관계가 존재합니다.

그 때문에 훌륭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 사람은

쉽게 짜증이 나는 기분을 접하게 된다고 합니다.

융은 사회에서 거의 성인으로 불릴 만큼 존경을 받는 한 남성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나흘이 되도록 그의 주변을 맴돌았지만 아무런 흠을 발견할 수 없자

융은 열등감이 커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4일째 되던 날 그의 아내가 융에게 상담을 신청하게 된 이후에 융의 열등감은 사라졌습니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남성의 자아는 페르소나와 동일시된 상태에서

자신의 아니마를 아내에게 투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아내는 자신도 모르게 심한 신경증을 수반한 희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페르소나가 자아를 끌어당기는 것처럼

무의식이 자아를 사로잡는 것과 같습니다.

밖으로 페르소나에 매어 있는 사람은

안으로는 무의식의 영향력에 있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남성은 여성화된 유약함

즉 기분, 변덕, 소심함, 심지어 맥 빠진 성생활로 점철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이처럼 아니마/아니무스는

페르소나와 대극의 위치에서 보상기능을 수행합니다(KGW 3, 100-103).

 

그가 되어야 할 이상적인 남성상인 페르소나는

안으로는 여성적 유약성으로 보상됩니다.

그리고 개체가 밖으로 강한 남자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안으로는 여성, 즉 아니마가 됩니다.

왜냐하면 페르소나에 대립하여 나타나는 것이 아니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아를 페르소나와 동일시하면 할수록

외향화된 의식의 눈에는 내면세계가 어둡고 보이지 않게 되며

더 나아가 자신의 유약함을 그만큼 생각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페르소나의 반대 부분인 아니마도

완전히 어둠 속에 남게 되어 먼저 밖으로 투사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주인공은 아내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됩니다

(CW 7, par. 311; KGW 3, 103).

 

자아가 페르소나와 동일시될 때 페르소나와 아니마는 구별할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결국 자아는 아니마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심각한 정신적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내(자아)가 원하는 것과

나의 직무(페르소나)가 원하는 것을 구별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나의 직무(페르소나)가 원하는 것과

나의 아니마/아니무스가 원하는 것 사이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건강한 자아는 페르소나와 아니마/아니무스 사이에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주체가 됩니다

(KGW 3,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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